서툰 위로가 더 깊이 남는 이유 – 이정훈 산문집 리뷰
2021년 '책과강연'의 만다라 차트 세미나, 그리고 '백일백장' 1기 활동을 통해 이정훈 작가를 처음 접했다. 여러 프로그램에서 마주한 그는 늘 차분했고, 무엇보다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몇 발자국 떨어져 지켜본 그의 태도는 이번 산문집 속에 거의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과장하지 않고, 먼저 듣고, 조용히 정리해 말하는 방식. 총 41편의 산문 곳곳에서 그 일관된 태도를 만날 수 있었다. 정답을 강요하는 대신 고요한 여백으로 마음을 두드리는 이 책의 리뷰를 남긴다.

물의 기억으로 그려낸 삶의 윤곽
책에 실린 38번째 산문 '파도는 알고 있을까'는 물의 기억으로 시작한다. 울릉도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군 복무를 하고, 섬나라 일본에서 유학을 한 저자는 자신의 삶의 지도를 바다의 윤곽으로 그려낸다. 태어난 곳도 섬이고, 군 복무지도 섬이며, 유학지도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였다.
"내 몸속을 흐르는 물이 그 근원을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267)
퇴근이 빨랐던 어느 날, 설명할 수 없는 끌림으로 강릉 바다를 찾은 그는 허공에서 부서지는 너울을 바라보며 '바다는 바다로, 나는 나로 존재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이소룡의 명언 'Be water, my friend'가 떠올랐다. 형태에 매이지 않되 본질은 잃지 않는 물. 부서져도 다시 모이고, 흩어져도 여전히 물인 것. 저자의 글 역시 주제와 배경이 달라져도 하나의 일관된 목소리를 유지한다. 크지 않지만 분명하고, 빠르지 않지만 멈추지 않는 그 목소리가 독자의 마음에 조용히 흔적을 남긴다. 한 편의 산문이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41편이 겹겹이 쌓여 하나의 물결을 이루는 구조다.
서툰 위로가 남기는 깊은 여운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위로를 건네는 방식'이다. 41편의 산문은 저자가 사람들과 만나며 겪은 일들, 그리고 위로가 필요했던 순간들을 조명한다. 문체는 조용하고 절제되어 있으나 감정의 여운은 길게 남는다. 정답을 강요하는 대신 머뭇거림과 침묵을 허락한다. 마치 강릉 바닷가의 파도처럼, 다가왔다가 물러서고, 사라졌다가 흔적을 남기는 방식이다.
41개의 글은 41개의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어떤 글은 위로를, 어떤 글은 공감을, 어떤 글은 그저 곁에 있음을 전한다. 하지만 그 모든 글의 기저에는 '서툴러도 괜찮다'는 일관된 메시지가 녹아 있다. 완벽한 문장보다 흰 물거품 같은 숨이, 논리적인 통찰보다 잠깐 머무는 고요가 사람을 살릴 때가 있다. 저자는 독자의 상처를 치료하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대신 상처 옆에 조용히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그 거리감이 오히려 신뢰를 만든다. 섣부른 조언이 벽을 세울 때, 말없는 동행이 문을 여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41번에 걸쳐 보여준다.
나만의 속도를 인정하는 연습
책을 덮고 난 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나의 파도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저자는 독자에게 자기 속도로 회복할 권리를 돌려준다. 모든 파도는 제시간에 제자리에 닿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면서 말이다. 빠른 속도전과 정답만을 강요하는 일상 속에서, 이 책은 멈춤과 느림의 가치를 환기시킨다.
이 책을 읽은 뒤 일상에서 완벽주의를 내려놓고 나만의 속도를 인정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바뀐 것은 대화 습관이다. 예전에는 누군가 힘들다고 말하면 즉시 해결책을 제시하려 애썼다. '이렇게 해봐', '저건 해봤어?'라는 말을 반사적으로 꺼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부터는 일단 끝까지 들어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 공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산문집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루를 완벽하게 보내지 못한 날에도 자책 대신 '오늘의 파도는 이 정도였다'고 인정하려 한다. 퇴근 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저녁이 있어도, 그 멍한 시간 자체가 나에게 필요한 썰물이었다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리해서 훌륭한 답을 찾기보다, 서툴더라도 진실하게 현재의 감정을 직시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누군가의 섣부른 조언보다 조용한 경청과 여백이 필요한 사람, 통찰력 있으면서도 감정선이 정제된 담백한 에세이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이 산문집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정훈 작가의 41편의 산문은 41번의 밀물과 썰물 같다. 책을 읽고 나면 마음에 41개의 작은 물결이 남는다. 어떤 것은 이미 지나갔고, 어떤 것은 아직 닿지 않았다. 각자의 속도로 부서지고 스며들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이 전하는 위로의 방식이다. 서툴지만 진실하기에, 더 깊고 오래 남는다. 마음의 밀물과 썰물을 차분히 마주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산문집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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